2022. 8. 18. 16:50ㆍ카테고리 없음
최초의 영사기의 발명
최초의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논하기 전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영사기를 누가 만들었는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최초의 영사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마스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영사기를 발명하였다.
이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의 단점은 한대당 한사람만이 볼 수 있는 장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동시에 관람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장치는 훌륭했으나 뭔가 모자람이 있었다,
그리고 자판기 처럼 동전을 넣고 한 사람만이 관람을 했고 이름은 "페니 아케이드"라고 불렸다.
현대적인 영사기의 발명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던것은 1895년에 프랑스에서 그 기원이 시작된다.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의 단점을 개량하여 뤼미에르 형제(Les freres Lumiere)는 "시네마토그라프" (프랑스어: Cinématographe)라는 영상기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현대적인 영화의 출발점이다.
이 기계는 초당 16장의 사진을 스크린에 비추었는데, 지금의 필름 방식 영화는 1초에 24장을 보여준다.
당시에 16장이라는 것은 비용과 노력을 생각하면 초당 적은 수의 프레임은 아닌 것 같다.
이 장치의 이름이 현재까지 전해지면서 영화는 시네마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리고 있다.
최초의 영화
최초의 영화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네마토그라프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1895년작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라는 영화로 당시 공장의 일군들이 일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 장면을 약 1분 정도로 찍은 것이다.
요즘 영화들이 러닝타임이 약 2시간 내외인 점을 생각하면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 정도의 아주 짧은 영화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896년에 "열차의 도착"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만든다.
이 영상은 아주 유명해졌는데, 당시 입장료 1프랑을 받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봤다는 점에서 최초의 상업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전해지는 말로는 스크린에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에 놀라서 극장 밖으로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마치 당시 사람들은 영화라는 것을 처음 보니까 지금의 3D 영화처럼 기차가 튀어나온다고 생각한 듯싶다.
뤼미에르 형제의 생각
지금 생각하면 영화 발전의 위대한 아버지쯤으로 여겨지는 인물인데 뤼미에르 형제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이 형제가 만든 시네마토그라프는 "미래가 없는 발명품"이라고 생각했고 시네마토그라프를 팔고 컬러 사진에 몰두했다.
이 부분은 좀 아쉬운 부분이다.
최초의 한국영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영화 중에 최초는 무엇일까?
1919년 "의리적 구토"라는 영화가 아마도 최초의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영화라기보다는 연쇄극의 일종이었는데, 연쇄극이란 연극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장소 또는 장면을 미리 촬영해서 극 중에 무대에 상영하는 방식이다.
당시 영화 제작비는 5천원이였다고 하는데, 보통 시골에서 부자의 전재산이 1천원인점을 감안할때 상당히 큰 돈이였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가 장소나 상황을 변경할 때 해당 장면을 상영해서 연극의 현실감을 높이는 데 사용되었다.
"의리적 구토" 상영 당시의 매일신보 기사에는 "단성사의 初日(초일), 관객이 물미듯이 드러와"라고 전하고 있다
최초의 한국 영화로 기록되는 의리적 구토의 내용은 계모가 집안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음모를 꾸미자 부잣집 아들인 송산이라는 사람이 정의를 실현하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전해지지만 대본이나 관련 사진 등의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에 개봉을 했으며, 이 날을 기념하여 영화의 날로 저정 되었다.
현대시대는 휴대폰 카메라로 4k 동영상을 찍을수 있고, 버튼만 누르면 지구 반대편까지도 순식간에 보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누리는 이러한 모든 과학기술은 생활화 되었고, 이제는 자동차도 전기차가 도로를 주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것이 작은 손바닥만한 기기로 제어가 되고 휴대가 된다.
얼마나 행복한 시대인가,,,,